경기 시작 전 기념행사에서 웃는 얼굴로 악수를 나눈 벵거 감독과 무리뉴 감독
지난 20일 벵거 감독이 아스날 지휘봉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한 후 어찌 보면 벵거 감독과 무리뉴 감독의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경기였다. 추후에 벵거 감독이 새로 지휘봉을 잡게 되는 팀에서 무리뉴 감독을 만날 수는 있겠지만 사실상 두 감독의 만남은 마지막이었다.
2004년 처음 맞대결을 시작으로 그동안 '관음증 환자', '실패 전문가' 등 거친 표현과 몸싸움까지 벌여가면서 수도 없이 싸워온 두 감독의 장면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많이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두 감독은 이날 마지막까지 치열한 승부를 보여주면서 그동안 라이벌이었던 관계를 다시 한번 더 입증해냈다.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승부는 승부였나 보다. 이날 맨유와 아스날 그리고 무리뉴 감독과 벵거 감독의 승부는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맨유 vs 아스날 선발 포메이션
이날 무리뉴 감독과 마지막 일전을 맞이한 벵거 감독은 선발 라인업에 대거 변화를 줬다. 챔버스, 마브로파노스, 메이틀랜드-나일스, 넬슨 등 기존에 1군 무대에서 많이 보지 못한 유망주들을 기용하면서 승리보단 경험에 초점을 맞췄다. 아마 주중에 있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유로파리그 경기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반면 무리뉴 감독은 산체스를 비롯해 루카쿠, 포그바, 마티치 등 사실상 베스트 일레븐을 들고나오면서, 아스날을 확실히 잡고 2위 자리를 굳히고자 했다. 특히 맨유는 지난 21에 열린 FA컵 4강 토트넘전과 라인업을 비교했을 때 린델로프 한 명만 바뀌었다. 무리뉴 감독은 아마 오늘 들고나온 라인업이 최근 좋은 결과물을 가져와 준 만큼 선수들을 믿고 가는 듯했다. 게다가 FA컵 결승전까지 생각한다면 지금의 라인업을 계속 유지하면서 전술을 세세하게 가꾸어나가려는 의도도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기존의 4-2-3-1 대형(왼쪽), 공격 시 전환되는 4-3-3 대형(오른쪽)
이날 아스날은 원래 4-2-3-1 포메이션이었지만, 공격 시에 4-3-3 대형으로 전환하면서 움직였다. 아스날은 공격 전개 시 자카를 제외한 미드필더와 앞쪽에 세 명의 공격자원들이 모두 맨유의 중앙 지역으로 밀집했다. 실제 이날 이워비는 자주 출전하던 측면이 아닌 중앙에 나서면서 공격을 이끌었고, 미키타리안과 넬슨 모두 하프 스페이스 지역에서 뛰면서 중앙으로 많이 들어왔다. 대신 측면은 적극적인 오버래핑을 시도하는 베예린과 콜라시나츠에게 맡겼다.
이는 벵거 감독이 맨유의 중앙 미드필더 라인 사이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였다. 어떻게 보면 측면은 내주더라도 중앙을 두텁게 가져가면서 전반적인 경기를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아스날 선수들은 맨유 미드필더에게 강합 압박을 가하고 수적 우위를 점하면서 만들어지는 공간을 통해 맨유의 중앙 라인을 공략했다. 맨유의 중원을 흔들기 위해 다양한 공격 형태를 가져가기도 했는데, 2선 선수들이 유기적인 움직임을 통해 상대를 혼란시켰다. 앞서 말했듯, 나일스와 이워비는 중원에서 많이 움직였고, 미키타리안과 넬슨은 측면보다는 중앙으로 들어오고, 하프라인까지 내려와서 볼을 연계하는 데 일조했다.
아스날이 이렇게 4-3-3 대형을 유지하면서 공격을 극대화하고, 수비 밸런스도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해준 자카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자카는 홀딩 미드필더로서 주로 팀의 전체적인 공격 방향을 전환해주는 역할과 수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양측 풀백들이 적극적인 오버래핑을 시도할 수 있던 것도 자카가 밑으로 많이 내려와서 수비 가담을 했기에 가능했다. 이날 아스날 미드필더들은 중원으로 밀집하면서 맨유의 라인 사이를 효율적으로 공략해냈다.
기존의 4-3-3 대형(왼쪽), 실제 움직일 때 4-2-2-2 대형(오른쪽)
한편 무리뉴 감독은 아스날의 중앙 밀집형 전술을 대처하기 위해 4-3-3 대형에서 4-2-2-2 대형으로 선수들의 움직임을 지시했다. 특히 에레라를 보다 밑으로 내려 마티치와 더블 볼란치 형태로 기용했다. 수비력이 준수한 에레라가 마티치와 함께 포백라인 앞에 배치하면 중원 싸움에서 쉽게 밀리지 않겠다고 생각한 무리뉴 감독의 전술적 움직임이었다.
무리뉴 감독은 포그바를 마티치와 에레라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뛰게 하면서 공격 시에 린가드와 함께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주문했다. 실제로 이날 포그바는 중앙과 측면을 오가면서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맨유 공격을 이끌었고 득점까지 기록했다. 또한, 포그바는 린가드와 함께 아스날의 라인 사이를 공략하기도 했다. 이는 아무래도 아스날 풀백들이 높은 위치까지 전진하고, 후방에 자카 혼자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영, 발렌시아, 마티치, 에레라가 아스날의 미드필더 라인을 잘 봉쇄하고, 최전방에 위치한 산체스와 루카쿠가 상대 센터백들과 끊임없이 경합해주면서 더욱더 완벽하게 공략할 수 있었다.
실제로 후반전에 들어서 맨유는 경기를 완전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날 맨유는 전반전 동안 52.8%의 볼 점유율을 유지했지만, 후반전에는 무려 68%의 점유율을 일궈냈다. 무리뉴 감독이 벵거 감독의 전술을 완벽하게 대처해낸 셈이었다. 결국 아스날은 어쩔 수 없이 전반적인 라인을 내리고, 공격보다는 수비에 더욱 치우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후반전에 완벽한 용병술로 역전을 일궈낸 무리뉴 감독
벵거 감독의 전술을 완벽하게 대처해내면서, 아스날을 뒤로 물러나게 한 무리뉴 감독의 맨유도 후반전에 경기를 통제했다고는 하지만 애를 먹었다. 특히 후반 6분 만에 동점 골을 내준 뒤 맨유의 공격 전개는 수월하지 않았다. 아스날의 중원은 무리뉴 감독의 대처에도 불구하고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끈끈하게 버텨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카쿠가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전방에서 볼을 지켜줄 선수가 없는 것도 맨유로서는 뼈아팠다.
무리뉴 감독은 결국 후반 19분, 마샬과 펠라이니를 투입했고, 이 교체는 적중했다. 루카쿠가 부상으로 교체된 상황에서 맨유는 크로스 연결 상황에서 펠라이니가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펠라이니가 에레라 대신 투입된 만큼 만약 크로스가 차단되거나 공중볼 싸움에서 질 경우, 곧바로 역습을 허용할 확률이 증가했지만, 다행히 마티치, 포그바 그리고 풀백들이 적절한 위치선정과 수비력으로 커버해냈다. 그리고 추가 시간에 펠라이니가 역전 골이자 결승 골을 터트리면서 무리뉴 감독의 교체가 옳았다는 걸 증명했다. 실제 맨유는 이번 시즌 교체 선수가 기록한 골이 12골이나 된다. 이는 다시 말해, 무리뉴 감독의 용병술이 뛰어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경기는 결국 맨유의 승리로 끝나면서 벵거 감독과 무리뉴 감독의 19번째 맞대결은 무리뉴 감독이 승자로 기록됐다. 무리뉴 감독은 이날 전술적 대응과 완벽한 용병술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한편 벵거 감독은 패하긴 했지만, 이번 라운드에서 본인이 보여줄 수 있는 철학과 전술을 보여주면서 마지막까지 치열한 승부를 연출해냈다. 아스날을 떠나는 벵거 감독에게도 충분히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글=강동훈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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